‘워낭’과 ‘꽃남’

<앵커 멘트>

요즘 극장가에선 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소와 할아버지의 우정을 다룬 영화 ‘워낭소리’인데요, 독립영화로선 처음으로 관객 백만 명을 넘기며 선전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화려한 볼거리와 자극적인 설정의 이야기들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서로 극과 극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현상 뒤에 숨은 문화 코드를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농사를 숙명으로 알고 평생을 살아온 할아버지와 늙고 병든 모습마저 할아버지를 닮아 있는 마흔살 된 소. 총제작비 2억 원의 저예산 영화 ‘워낭소리’가 우리나라 독립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서울시내 한 멀티플랙스 극장. 거액의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은 영화들 틈에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소리가 상영중입니다.

<녹취> “워낭소리 10시 반인가요?” “네, 워낭소리 10시 25분 영화 있습니다.”

개봉관 7개에서 초라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한 달여 만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포함해

140여개 상영관에서 확대 상영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 중엔 유난히 4,50대 관객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삶의 이야기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었습니다.

<인터뷰>임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저 원래 영화 볼 때 안 울거든요. 그런데, 어렸을 때 제가 했던 거랑 똑같아요. 소가 팔려가는 장면도 되게 슬펐고..”

<인터뷰>황상숙: “열심히 일하던 소가 죽어서 파묻을 때가 제일 슬프지. 사람도 그런 거 같아요. 열심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만 하다 죽는 사람, 참 많잖아요.”

<녹취> “이 소하고 나하고 같이 죽을거래.” (이 소가 먼저 죽으면 어떻하시게요? 장사지내주나요?) “치러줘야지. 내가 상주 질 할건데."

제 몸도 주체하기 힘들어 보이는 늙은 소가 끄는 낡디 낡은 손수레에 몸을 실은 최 노인.

그에게 30년을 함께한 소는 9남매를 모두 공부시키게 해준 최고의 일꾼이었고,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는 가장 친한 벗이었습니다.

<녹취> “참 불쌍해요.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나한테는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사람으로 치면 백 살에 가까운 마흔 살 늙은 소의 죽음을 할아버지는 쉽게 받아들일 수 가 없습니다.

<녹취> (소가 병들었다면서요?) “아휴, 나이가 많네요. 40가까이 됐는데, 이건 거의 다 된겁니다.” (1년밖에 못살아?) “안그래....”

3년이란 긴 시간동안 경북 봉화의 한 시골 마을에서 촬영된 이 다큐멘터리 한 편이 삽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지난달 15일 개봉한지 채 20일도 안 돼 관객 10만 명을 모으며 이변을 일으키더니, 개봉 한달 만에 60만 명을 돌파했고, 지난 금요일엔 누적 관객 백만 명을 넘어서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인터뷰>조계영: “저희들은 극장이 이렇게 많이 늘줄 몰랐고, 원래 7개관에서 시작했으니까, 입소문이 나서 한 20개 관에서 25개관정도로 한 두달 장기 상영하면 10만에서 15만 정도 가지 않을까...”

‘독립영화’하면 떠올리게 되는 ‘무거움’대신, ‘진한 감동’을 내세우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게 배급사측의 분석입니다.

<인터뷰>조계영: “새해 첫 개봉하는 한국영화이기도 했고, 새해 희망찬 부분도 있고 해서 웃음도 좋지만, 감동 쪽으로 코드를 말아가서 어필하는 건 어떨까, 하는 내부적인 판단도 했고, 그래서 예고편이나 포스터나 비주얼적인 부분에서도 감동적인 부분을 부각시키자...이후에 웃음과 감동을 같이 엮어서 진행하게 됐죠.”

방송국 외주제작사 pd로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는 이충렬 감독을 만났습니다.

<인터뷰>이충렬 감독: “개인적으로 공황장애도 앓았었고, 그래서 이제 워낭소리가 마지막 선택이었어요. 안되면 다른 일 하려고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공들여서 했던 부분이고, 영화쪽으로 넘어오면서 의외로 워낭소리가 잘되고 있는거죠.”

그는 ‘워낭소리’를 통해 기억 속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이충렬 감독: “10여년 전에 IMF 외환위기 당시에 기획하게 됐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시골에서 자랐고, 그래서 부모님들한테 빚진게 많아요. 대학 교육까지 시켜서 대학도 나올 수 있었고, 그리고 특히 아버지하고는 상당히 먹먹해요. 소통도 잘 안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만에 다시 닥친 불황, 사람들은 경북 봉화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저마다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불황속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월요일 저녁 한 주택가 찜질방 텔레비전 화면에서 주부들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인터뷰>박금자: “속이 시원하죠. 저런 거 하면 복수하는 게 똑같아요, 여자들 심정이 다 똑같잖아요. 남자가 저러면 어느 여자가 가만히 있겠어요?”

40%대의 시청률을 넘나들고 있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입니다. 불륜과 배신, 복수라는

자극적인 설정으로 버무려진 드라마로 ‘국민 막장드라마’란 수식어까지 붙었습니다.

<인터뷰>박금자: “저 여자를 그렇게 욕해, 저 애 엄마. 아들 가전 엄마 보고 못된 년이라고 욕하는거예요. 실제 자기가 당한 것처럼 그렇게 욕을 하더라고. 그런데도 보면 아주 재미있어요. 욕하면서도 보다 보면 드라마보다 더 꼬인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는 겁니다.”

<인터뷰>주영태: “저런걸로 인해서 스트레스 해소를 많이 한다고 봐요. 나도 재미있던데.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재미있더라고.” (스트레스 해소가 많이 되세요?)

“네. 7시만 되면 저거보려고 나도 밥 후다닥 먹고 저거 봐.”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한 드라마 ‘꽃보다 남자.’ 네 명의 꽃미남들과 화려한 볼거리로 무장한

이 드라마의 인기도 요즘 폭발적입니다.

<인터뷰>전기상 pd: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초 재벌의 세계, 여기서 보여주는 환상, 새로운 세계,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엿보기에 대한 호기심이 작용한 것 같고...”

학교 폭력과 왕따,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 등으로 비판도 많이 받고 있지만 시청률 만큼은 30%대를 넘나듭니다.

<인터뷰>유해인(중 2): “멋있잖아요. 돈 쓰는 게 너무 멋있어요.부잣집 재벌 구준표!”

<인터뷰>민정자: “준표가 좋아. 그런데 그 사람하고 연예하잖아요. 옆에 세 남자가 자꾸 달려드니까 그게 애처롭고, 또 준표 엄마가 부자잖아...그 엄마가 부러워.”

재벌과 평범한 세탁소집 딸의 만남 같은 현실에선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지만

현실 속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인터뷰>이민호(꽃남주인공): “과장되고, 오버된 상황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재미를 느끼고, 금잔디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여성분들은 대리만족, 그런 것들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녹취> "우리는 F4입니다“

드라마가 속 소위 ‘상위 1퍼센트’의 생활은 코미디의 소재로까지 패러디되고 있습니다.

<녹취> 박휘순: "난 3일 동안 한국에 없을 거 같아. 커피 마시러 브라질 가거든."

백마 탄 왕자님이 선사하는 판타지와 독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불륜과 복수가 넘쳐나는

드라마들. 그완 반대로 기억 속 고향을 담담하게 다시 불러낸 다큐, ‘워낭소리’.

극과 극이라고 해도 될만한 서로 다른 문화 콘텐츠가 2009년,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유는 뭘까.

<인터뷰>김헌식(문화평론가): “불황기일 때 몇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첫번째 복고, 과거에 대한 향수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두 번째는 선정적, 감각적인 내용들이 많이 선호가 되겠죠. 컨텐츠도 복잡하거나 새롭거나 낯선 것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것, 익숙한 것, 감각적인 것 원초적인 것을 선호하게 된다는 거죠.”

자극적인 설정 가득한 드라마들의 성공과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온 다큐 한편의 선전은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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